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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

                                                                                            길희성 2012. 03. 09 [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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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 쯤 보이지 않는 신/하느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일상에 매몰되어 신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볼 겨를도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도 죽음에 임박해서는 누구나 신에 대해, 그리고 내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최근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말년에 어느 신부님께 물었다는 20여개의 질문도 누구나 한 번 쯤은 생각해보고 묻고 싶은 질문들일 것이다.

 

도대체 신은 존재하는가? 어떻게 신의 존재를 아는가? 더욱이 신이 존재한다 치더라도 신이 과연 우리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할까? 혹시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자기들의 온갖 희망을 투사해서 만들어 낸 건 아닐까? 왜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신에 대해 그토록 집착하며 때로는 소중한 목숨까지 바칠까? 신은 무소불위이고 전지전능하다는데, 그럼 우리 인간은 꼭두각시란 말인가?

 

신은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는데, 어째서 신이 주관하는 세상에 그토록 많은 억울한 고통과 눈물이 존재하는가? 기적이라는 게 정말 있는 것인가? 왜 신은 어떤 사람의 기도는 들어주고 어떤 사람의 기도는 외면하는가? 이렇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데, 왜 신은 당당하게 나타나 보이지 않고 숨어서 우리를 괴롭히는가라고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여하튼 신은 풀리지 않는 암호와 같다. 풀리면 무언가 굉장한 것이 숨어 있을 것 같은데 풀리지는 않고 궁금증만 더해 간다. 그래서 신앙의 문에 이미 들어선 자들은 말한다. 그렇게 따지고만 들면 평생 신을 믿지 못 할 것이다.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 신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먼저 믿어야 안다. 또 직접 체험해 봐야 안다고 하면서 자신의 신앙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도 많다. 초월적 실재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이성보다는 하느님의 계시를 겸손한 마음으로 수용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신은 죽음의 문턱에 선 환자가 의사를 찾는 절박한 심정으로 찾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한가한 사변이나 철학적 논쟁을 일삼는 자는 절대로 알 수 없다고 한다.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윌리암 제임스는 <믿으려는 의지>(Will to believe)라는 책에서 관찰자적 자세로 따지면서 신앙의 문제를 대하는 사람을 연애하는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애인이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지 관찰하고 관망만 하려는 사람에 빗대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랑이 성사되기 어렵고,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대쉬하는 자에게 사랑은 성사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중세 신학자 안셀무스는 “알기 위해 믿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이다.  

 

 나 자신도 젊은 시절 이런 실존주의적 사고에 매료되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지닌 문제점과 한계도 간과할 수 없다. 당장 이런 반문이 생길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믿느냐? 모르는 것을 믿는 게 신앙이란 말인가? 신앙은 반드시 지성의 희생을 요구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똑똑한 사람은 신앙과 인연이 없고 머리가 좀 둔한 사람이나 인생에서 커다란 시련과 위기에 봉착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신을 찾는 자들에게만 신앙의 문이 열린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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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절박한 마음도 없고 기적의 경험이나 극적인 신앙 체험 같은 것이 없는 대다수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신앙을 갖기 위해서, 아니 갖고 싶어서, 억지로라도 그런 것을 추구해야 할까? 신의 문제에 ‘신앙의 비약’(leap of faith)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자칫하면 우리의 실존적 결단이나 마음가짐이 신의 존재 유무를 결정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고 문제에 대한 정면 승부를 피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을 지적으로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신앙이 설 자리는 없다. 더욱이 신의 문제에서 확실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된다. 신을 유한한 사물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객관적 지식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이 신앙인 것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확실한 지식은 오히려 신앙의 적이다. 진정한 신앙은 지식의 확실성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 감행되는 자유의 모험과 비약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실존주의자들의 생각은 타당하다.

 

 신앙에 대해 어린 시절의 유치한 생각과 말을 버리게 되었다고 하면서 성숙한 생각과 말을 권면하는 사도 바울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 속 영상 같이 희미하게 봅니다(옛날 거울은 지금처럼 투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라고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는(visio dei) 확실한 앎은 사후의 종말적 희망으로 넘기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지상에서도 ‘희미한 앎’ 정도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신앙이 그야말로 암중모색이거나 무조건적인 지성의 희생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확신>과 <맹신> 사이 중간쯤에 있을 것 같다. 확신도 위험하고 맹신도 위험하다. 확신에서 오는 독선과 배타주의, 맹신에서 오는 무지와 어리석음, 그리고 둘이 합치는 경우에 생기는 <광신>의 피해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상의 순례자로 있는 한, 신을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한다.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더 바라면 무리가 따르게 되고, 무리가 따르면 위험해진다. 

 

 신의 존재 여부보다 선행해서 다루어야 할 문제는 어떤 신을 두고 존재여부를 논하는가이다. 신에 대한 관념이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신을 하늘에 있는 어떤 근엄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거나 저 높은 곳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감시하다가 상벌을 내리는 하늘의 경찰관처럼 생각한다면, 그런 신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이 신에 대해 가지는 관념은 실로 천차만별이며, 같은 그리스도교 신자라 해도 만 명이면 만 명이 다 신관이 다를 것이다.

 

 결국 그런 신이 존재하든 안 하든 각기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셈이다. 순수한 유일신 신앙은 말뿐이며 실제로는 모두가 다신을 숭배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신숭배냐 유일신 신앙이냐 하는 것은 단지 신의 숫자 노름이 아니다. 유일신을 믿는 신앙인은 항시 정직하게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면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우상을 타파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유신론과 무신론의 구별은 절대적일 수 없고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가령 신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믿지 않는다는 신이 도대체 어떤 존재냐고 물으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신은 나도 안 믿는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책임 있는 무신론자, 의미 있는 무신론자가 되기가 공부를 필요로 하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유신론자들도 끊임없이 자신의 신관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만, 진지한 무신론자에게도 그러한 수고는 필수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어떤 신관을 가지고 어떤 신을 믿느냐에 따라 이 글 초두에 나열했던 신에 대한 많은 의문들이 문제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정론(theodicay)의 문제, 즉 전능하신 사랑의 하느님이 왜 선한 사람이 당하는 억울한 고통을 외면만 하는가라는 문제가 신관에 따라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같은 인격신관이라도 신이 인간 역사에 전혀 관심이 없고 관여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신관에서는 - 이신론(理神論, deism)이 그렇고 힌두교의 신관이 주로 이런 부류에 속하지만 - 악에 대해 신의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물을 필요도 없으며 묻는다 해도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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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mythos)에서 로고스(logos)로 결정적인 발을 내디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더 이상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나 호머의 서사시 같은데 등장하는 신들을 믿을 수 없었다. 우리 인간들처럼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으며 툭하면 질투하고 싸우고 화를 내며 속이기도 하는 신들, 그래서 도덕적으로 인간보다도 열등한 존재들을 그들은 더 이상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존재론적 사유를 통해 더 고차적인 형이상학적 신관을 제시하게 되었다. 다신신앙이 보편화되어 있는 문화에서는 엄격한 유일신 신앙인은 무신론자로 간주되기 쉽다. 사실 고대 로마 시대에 기독교인들은 로마인들이 섬기는 신을 부정했기 때문에 ‘무신론자’라는 비판을 받고 박해를 받기도 했다. 자연과 인간의 삶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매우 친근하게 여겨졌던 각종 신들을 기독교인들이 초월적 신의 이름으로 부정하니 당연히 그런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다신숭배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서적인 신관, 즉 유일신 인격신관도 철학자들의 눈에는 항시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간주하는 성서적 인격신관의 본령은 하느님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지만, 인격신관은 자칫하면 인간의 온갖 욕망과 편견을 신에게 그대로 전이시키기에 매우 편리한 신관이다. 이런 면에서, 만약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이나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성서적 인격신관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같은 사상과 접맥시켜 고차적인 형이상학적 신관을 수립하지 않

았더라면, 그리스도교는 아마도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유신론과 무신론 담론이 더 이상 다신교나 다령숭배를 두고 진행되지 않고 주로 기독교 신관을 전제로 하게 된 것도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신앙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다신숭배를 철저히 몰아낸 결과이다. 사실 다신숭배가 지배하는 문화에서는 그리스도교 배경을 지닌 서양 사회에서 말하는 의미의 ‘무신론자’로 불릴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현대적 의미의 무신론은 서양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발생한 현상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무신론과 기독교적 유일신관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가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무신론과 유신론의 담론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우리가 신에 대해 사용하는 언어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일반 신자들은 성서의 언어를 비롯해서 신에 관한 말을 모두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근본주의(fundamentalism) 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보는 신학자들은 거의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이 세상의 사물에 관한 것이기에 그런 언어를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 하느님께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상숭배를 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간주되는 성서의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 해도, 또 아무리 성령의 영감을 받아 씌어졌다 해도, 이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주어지는 한 결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그런 문제를 안고 있다. 하느님이 마치 우리 인간들처럼 입을 가지고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개념도 결코 문자 그대로 취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초월적 실재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일단 우리의 언어가 신과 세계에 대해서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다시 말해 문자적 의미로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타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언어의 유비적(analogical) 사용이라고 부른다. 신의 언어를 상징적으로 혹은 메타포로 사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어떤 사람을 ‘곰’이라 부를 때, 그가 문자 그대로 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곰’이라는 말이 그 사람이 지닌 어떤 특징이나 성품을 다른 어떤 말보다도 더 잘 표현하기 때문에 곰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메타포나 상징이라 해서 아무 소용없는 빈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메타포가 문자적 의미보다도 훨씬 더 잘 드러내주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가령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말에 빗댄 유비적 의미를 지닌 개념이지만, 그럼에도 하느님에게 인간의 언어 행위와 유사한 어떤 성품이 있다고 신앙인들이 믿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개념을 인간이 사용하는 말과 동일한 의미(univocal)가 아니고 그렇다고 전혀 다른 의미(equivocal)도 아닌 유비적(analogical)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유비적 의미로 사용한다 해도 신에 대해 이런저런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불경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신에 대해서 아예 침묵하던지 아니면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따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즉 신이 어떠어떠하다고 말하는 긍정적 언사보다는 어떠어떠하지 않다고 말하는 부정적 언사만을 사용하는 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체로 신비주의자들은 초월적 실재, 무한한 실재, 절대적 실재를 가리키기 위해 이러한 부정의 길을 많이 선호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고대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는 절대적 실재인 아트만(Atman) 혹은 브라흐만(Brahman)에 대해 ‘...도 아니고 ...도 아니다’(neti-neti)라는 식으로 말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으며, 우리가 잘 아는 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는 것도 부정의 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선불교에서 ‘무’자를 사용해서 하는 무상, 무념, 무언, 무심, 무아 같은 말들도 그렇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대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도 하느님은 유(有)가 아니라 무(無)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정의 길만이 능사는 아니다. 부정의 길은 우리에게 인간의 지성을 뛰어넘는 고차원적 세계,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불가언적 실재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 말라는 지혜와 경고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해 부정적 언사를 사용한다 해서 문제가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어떠어떠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이 당장 제기되기 때문이다. 부정적 언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이미 신이 어떤 존재라는 것, 적어도 그가 물질적 존재는 아니라든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든지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은 모든 인식과 언어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누구의 충고도 듣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 모순을 피하려면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든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완전히 침묵을 지키는 도리 밖에 없다. 문수보살과 불이(不二)의 진리를 논하다가 자기 차례가 되자 한참 동안 ‘우뢰 같은 침묵’을 지킨 유마거사의 이야기가 전형적인 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무조건 존재한다고 대답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선, ‘존재’라는 말의 의미부터 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이 돌이나 풀이나 우리 같은 인간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곧 인정할 것이며, 그런 뜻에서라면 우리는 신이 차라리 존재가 아니라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을 무(無, nihil)라고 표현하는 신학자가 있는 것이다.

 

평생을 하느님 신앙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만 하다 가신 다석 유영모는 하느님을 ‘없이 계시는 분’이라고 불렀다. 문자적으로 모순이지만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표현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감탄한다. 여하튼 하느님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신앙인 한, 신앙인들은 하느님에 대해 최소한 ‘존재’라는 개념만이라도 유비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른 어떤 개념보다도 이 개념을 선호했으며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를 그의 신학 사상의 축으로 삼았다.

 

 다소 난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대 철학의 거장 하이데거는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라는 개념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을 평생의 철학적 작업으로 삼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따르면, 서양 철학의 전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로서, 심지어 보이지 않는 실재를 논한다는 형이상학적 사유마저도 서양에서는 존재자만을 다루어 왔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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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비판의 타당성 문제는 접어두고, 유신론자들이 그의 비판에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점은 하느님이 하느님인 한 적어도 ‘존재자’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다. 하이데거의 관심은 전통적인 유신론-무신론의 문제에 있기보다는 그가 생각하기에 더 본질적인 문제에 있다. 즉 우리가 사물을 대하는 근본 태도 내지 자세에 관심을 두고 있다.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자들에 사로잡힘으로써 신들이 사라져버리게 된 세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존재라는 개념이 신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면, 우리는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이 대답을 거부한 14무기(無記)의 문제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 즉 번뇌를 말끔히 제거한 여래가 사후에 열반에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관점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이 직접적인 대답을 거부하거나 피한 것은 아무래도 열반(Nirvana)이라는 초월적 경지에 대해서 ‘존재’나 ‘비존재’ 같은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음을 의식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하튼 이것은 하이데거의 문제의식과는 다른 성질의 문제이다. 그는 우리가 존재를 의식하고 존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로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존재자들이 훌훌 새어나가는 허무(Nichts)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허무의 경험을 통해서 존재의 신비 내지 개시(開示)에 접하는 계기가 된다고 그는 말한다. 사실 죽음에 직면해서 신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고대인들이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을 불사의 신들과 달리 ‘죽을 존재들’(mortals)이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나 경건한 신앙인 치고 인간의 유한성과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자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존재가 무의 베일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면, 신앙인들에게는 신은 피조물의 허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은 피조물들을 ‘무에서 창조했’(creatio ex nihilo)고 한다. 이 말이 뜻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모든 피조물이 따라서 허무의 그림자를 안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없이 계시는 분’이라면 피조물들은 ‘있이 없는 것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죽음을 통한 무와의 대면은 우리를 허무주의로 몰아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우리 자신과 주변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신비와 ‘은총’에 눈을 뜨게 해주며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게 해줄 수도 있다. 죽음이란 우리 유한한 존재들에게 감추어진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말할 수 없는 신 자체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신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즉 신에 대한 언어의 성격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신이 누구 또는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기보다는, 신에 대해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님을 말하면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신에 대해 무언가를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이리 복잡하냐고? 신은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고 사람과 같은 존재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신에 대한 모든 개념과 언어는 결국 암호이며 상징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신(God)이라는 단어도 하나의 상징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은 보통명사지만 그 자체로는 별 내용이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떤 의미를 담아 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이라는 세 유일신 종교의 영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이라는 말도 여전히 하나의 상징인 것은 사실이며, ‘창조주’라는 개념처럼 어떤 내용을 지닌 말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신의 암호’라는 말뿐 아니라 ‘신이라는 암호’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폴 틸리히 같은 현대 신학자는 신이라는 단어가 너무 흔히 사용되어 현대인에게 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면서 그 대신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궁극적 관심’이란 다른 어떤 사물이나 가치에 우선해서 우리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지고선(the highest good)을 가리키는 말이며, 동시에 그런 관심과 사랑에 사로잡힌 상태인 신앙(faith) - 이 말 역시 너무 흔하게 사용되어 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틸리히는 지적한다 - 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의도된 것이다. 신에 관한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는 식의 인식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좀 더 철학적으로 신을 존재의 근거/근저(the Ground of Being) 혹은 존재 자체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이 말은 신이라는 말과 달리 상징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취할 수 있는 개념이다. 신에 대한 모든 언어가 상징이지만 ‘존재의 근거’라는 말만은 예외적으로 문자 그대로 이해해도 된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모든 언어가 상징이라는 진술이 비상징적 진술이듯, ‘존재의 근거’라는 표현도 예외에 속한다는 말이다.

 

 신이라는 말이 하나의 상징이고 암호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가운데 하나는 중세 도미니코 회 수도자이며 신비주의 신학자였던 마이스터 엑카르트였다. 그는 그래서 신(Gott)과 신성(Gottheit)을 엄격하게 구별하기도 했다. 신성은 모든 속성과 이름을 벗어버린 신 아닌 신, 탈리히의 표현으로 ‘신 너머의 신’(God above God)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지자면 이런 개념들도 역시 초월의 암호들이다. 말을 사용하는 한 모두 암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언의 침묵이 최고다. 아니, 침묵이야말로 최고의 암호일지 모른다.

 

여하튼 우리는 동서고금을 통해 사용된 여러 가지 신의 암호들을 알고 있다. 도(道), 천(天), 태극, 공(空),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무(無),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같은 개념들이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런 개념들을 시대와 문화를 달리해서 인간에 의해 포착된 초월의 암호(Chiffre), 존재 자체에 대한 암호들이며 - 야스퍼스는 ‘상징’보다 ‘암호’라는 말을 선호하기도 한다 - 결코 존재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한다. 신의 암호들 혹은 신이라는 암호가 가리키고 드러내고자 하는 실재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암호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존재 자체를 드러낸다고 주장하면 다른 암호들은 배제되고 배타주의에 빠진다고 야스퍼스는 경고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 철학자 존 힉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위 개념들은 신의 다양한 이름들이며 문화적 제약 속에서 형성된 실재(Reality)를 가리키는 다양한 개념들이다.

 

 신의 암호든 신이라는 암호든, 암호란 해독을 위해 존재하고 해독을 해야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독한다는 말인가? 별 수 없다. 일단 신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신의 친구들 혹은 신의 아들과 딸들이 가르쳐준 ‘신의 암호들’ - 경전이든 어록이든 영성의 대가들의 증언이든 - 을 해독해 가면서 조금씩 신의 신비에 다가갈 수밖에 없다. 경전 공부, 영성의 고전 공부는 모두 이러한 해독작업이며, 신학이나 형이상학은 보다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해독작업이다. 암호가 암호이며 상징이 상징임을 잊지 않고 확신도 맹신도 경계하면서, 그리고 기도와 명상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찬찬히 해독의 노력을 기울여보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을 것이다. 투명한 거울 속 영상은 아니라도 ‘희미하게’나마 알기를 바라면서.

 

 신의 암호 혹은 신이라는 암호를 해독한다 해서 신에 대해 어떤 확실한 지식을 얻으려는 생각은 금물이다. 암호 너머로 무엇이 있는지, 어떤 세계가 열리는지 아무도 모른다. 안다 해도 말로 할 수 없으며, 영안이 특별히 밝았던 이전 사람들이 한 것보다 더 잘 말해줄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다. 각자 스스로 부딪혀볼 수밖에 없는 각자의 몫이다. ‘지식’은 신을 여느 사물처럼 물상화하고 대상화하기 때문에 신에 관한 한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 자체가 큰 지식이라면 지식이다. 해독의 목적은 신에 대해 어떤 구체적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해독 작업은 계속해서 또 다른 많은 암호를 양산할 것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우상을 부수면서 상징을 통해, 그리고 상징을 넘어, 초월적 실재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그 세계를 엿볼 수 있거나 감지할 수 있다면 퍽 다행일 것이다. 신의 암호 해독은 역설적인 작업이다. 불가능한 줄 하면서 하는 행위, 알 수 없는 것을 알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신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았다 하는 순간 모르는 것이 되고 만다.

 

무지가 최고의 지며, 침묵이 최고의 언어이고 무신론이 최고의 유신론이 될 수 있다. 신비주의자들은 따라서 ‘무지의 지’. ‘박식한 무지’(docta ignorantia)라는 모순적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며 학자들은 ‘신비주의적 무신론’(mystical atheism)을 거론하기도 한다. 선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아무 것도 ‘구할 바 없고’(무소구) ‘얻을 바 없는’(무소득) 경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아무 것도 알지 않고(nichts wissen),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nichts wollen), 아무 것도 소유하지(nichts haben)않아 텅 빈 마음의 가난이라고 말한다. 여하튼 신이라는 암호 해독은 언어와 무언, 상(相)과 무상(無相)의 끊임없는 상호부정의 교호작용과도 같다. 상과 언어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초월하여 무상과 침묵으로 이끌고, 침묵은 또다시 상과 언어를 낳는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일을 우리 인간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애당초 암호를 만든 것도 사람이고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이 본래부터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발생한 것이다. 신은 인간을 매개로 하여 자신을 알리며 세계는 인간을 매개로 하여 신을 안다. 인간이 본래부터 영험하고 영명하고 신령스러운 존재이다. 신성을 지닌 존재이고 하느님의 모상이며 신과 교신하면서 초월의 신호를 받을 수 있고 암호를 읽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아니, 인간 자체가, 인간의 마음 혹은 영혼 자체가, 신의 최고의 암호라고 영성의 대가들은 입을 모은다.

 

 암호의 해독 작업은 처음에는 암중모색처럼 느껴지겠지만 조금씩 의미가 통하는 기쁨도 누리게 된다. 내공이 싸여 가는 가운데 운이 좋으면 - 기연(機緣)이 무르익으면 - 매우 드문 일이지만 활연관통(豁然貫通)하는 대박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다. 신비주의자들은 이 ‘대박’을 절대와 상대, 신과 인간의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의 경험이라고 부른다. 이 합일의 경험 자체는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지만, 일단 언어화되면 또 다시 암호가 되고 또 다시 누군가에 의한 해독을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의 암호가 반드시 개념이나 언어 문자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종교의 언어는 말과 문자의 언어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다양하고 풍부하다. 사실 대다수 신앙인들은 정교한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다듬어진 교리보다는 시인들이 만들어낸 언어나 화가나 조각가의 작품, 몸의 언어인 춤이나 노래,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 혹은 신상, 혹은 장엄한 신전이나 성당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예배나 예불, 혹은 들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과 성자들의 평화로운 얼굴에서 더 많은 영감을 받는다.

 

 사실 깊은 영성의 소유자에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암호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그래서 어디서나 신을 만난다. 종교는 철학이 아니며 뛰어난 신학자나 형이상학자가 반드시 경건한 신앙인은 아니다. 개념과 언어는 암호나 상징이 되기보다는 문자적으로 이해되기가 쉬운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문자의 사용이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에는 신을 만나는 암호와 상징들이 현대 세계에서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했다는 사실, 경전의 문자적 의미를 고집하는 근본주의는 놀랍게도 현대적 산물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문자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보다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의 종교적 상상력이 훨씬 더 풍부할 수 있으며, 즉물적 사실의 세계만을 ‘현실’로 알고 사는 현대인들보다 말과 문자가 아닌 언어들에 더 많이 접하고 산 중세 시대 사람들에게 신에 다가가는 통로가 훨씬 다양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길희성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드는 통찰력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을,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서강대 명예교수이다. 적십자 총재를 역임한 한완상 박사 등과 대안교회인 새길교회를 이끌었고,
최근엔 사재를 털어 강화도에 고전을 읽고 명상을 할 수 있는 ‘도를 찾는 공부방’이란 뜻의 심도 학사(cafe.daum.net/simdohaksa) 를 열었다.
이메일 : heesung@sogang.ac.kr
 
길희성형제께서는,
초교파, 평신도 열린 신앙 공동체인 '새길교회'의 신학위원으로 현재 봉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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